농사를 잘 지으면 뭐하느냐는 이야기가 새삼스럽지 않게 된 것은 상당히 오래 되었다. 농산물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농산물이 남아도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농가들이 농산물 생산에서 보다는 농산물 판매에서 승부를 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제는 판매가 더 중요해졌고, 앞으로는 더 심해질 것이다. 농산물뿐만이 아니라 공산품에 있어서도 이제는 제조업체보다는 판매업체들의 힘이 훨씬 더 센 시대가 된 것이다.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센터와 같은 대형소매업체들이 어떤 제품을 생산원가나, 심할 때는 그 이하의 가격에 납품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열대에서 그 상품을 아예 빼내버린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이제는 아주 흔해졌다.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을 누른 것이라고 하면 불쾌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간척지 쌀을 기획상품으로 정했습니다.”는 전화를 받고, 이를 납품해온 지역 농협의 담당자는 한동안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다는 하소연도 이제는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해 왔는가? 이유야 어쨌든지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깝다. 먼저 기본적인 개념부터 잘 정리가 안되어 있는 것 같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농가들도 이제는 “유통”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유통이 무엇인가? 유통은 ‘흐를 유(流)’에 ‘통할 통(通)’이 합쳐진 용어다. 그래서 유통은 물건(상품)이 물 흐르듯 막힘없이 잘 흐르면 잘 된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나라 방방곡곡은 같은 날 같은 상품의 가격이, 운송비 차이만 빼고 똑같은 ‘1물1가’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산자나 상인이나, 운송업자가 각각 얼마씩 이윤을 챙기는가는, 전국 곳곳에 그 물건이 남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하는 “원활한 수급”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운송 팔렛트과 화물차 적재함과 포장용기의 규격을 통일하고, 등급과 규격을 통일하고 유통 중의 변질을 막는 등의 노력은 모두 “원활한 수급”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판매란 무엇인가? 어떤 때에 잘 팔았다고 하는가? 판매의 지상목표는 최대한 비싸게 파(받)는 것이다. 물론 상인들에게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 가장 잘 파는 것이지만, 농가는 농산물 생산비가 거의 주어져 있기 때문에 비싸게 팔수록 이윤이 커진다. 그런데 유통이 잘 될 때와 유통이 잘 안될 때 중에서 어느 때가 농산물이 더 비싸게 팔리는가? 잘 될 때 보다는 잘 안될 때이다. 그렇다고 농가들이 유통이 잘 안되기를 바란다거나 원활한 수급을 방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유통현장인 시장은 생산자와 상인과 소비자가 서로의 편익을 위해서 다투고 흥정하여 거래하는 곳으로 모두에게 공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농업인들에게 ‘유통’을 잘 하도록 도울 것인가, 아니면 ‘판매’를 잘 하도록 가르치고 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물론 둘 다 알아야 유통도 잘하고 판매도 잘할 수 있다. 그러나 농가들은 “판매자의 입장”에서 유통을 알아야 한다. 관점이 다르면 전략도 다르고 목적도 달라진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원활한 수급”이 우선일 것이기 때문에 “유통”을 중요시 하겠지만, 농가의 입장에서는 “소득 극대화”가 우선이기 때문에 “비싸게 팔기 위한 판매전략”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농가들의 관점과 수요에 과연 얼마나 충실해 왔는지? 나는 부끄럽다.